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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장의 사진 미학 - 1부 한 장의 사진을 보다 초상사진의 피사드 ~ 사진의 길과 격

kwendol 2008. 10. 13. 11:13

한장의 사진 미학

1부 한 장의 사진을 보다 초상사진의 피사드 ~ 사진의 길과 격


초상사진의 파사드

카메라를 마주 보는 정면성, 이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하는데 전면을 통해서 초상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초상사진의 전면성. 우리는 그것을 파사드라고 부른다. 파사드는 건축에서 쓰이는 말로 건축의 중심, 퍼스펙티브의 중심을 의미한다.

우리가 자주하는 말로 "전면에 내세운다"고 할 때 그 전면이 바로 파사드이다. 따라서 파사드는 전면을 통해서 드러나는 대상의특징이자 성격을 의미한다. 사진에서 파사드라는 말은 전면을 통해서 대상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특별한 초상사진일 경우에만쓴다. 사진의 정면성과 전면성의 차이점을 한마디로 말하면 정면은 구도의 방향에 가깝고, 전면은 대상의 정체성을 드러내는정보의 구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아우구스트 잔더, 미국의 위지, 다이안 아버스, 리차드 아베든을 비롯한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인물의 파사드에서 정체성을 구현하려고 했다. 인물의 정체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진이 바로 가족사진이다. 중국의 사진작가 리우리홍의 山里人家는 완벽한 초상사진의 파사드를 갖고있다. 이 이 가족사진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있다. 우리의 시선을 강력하게 잡아끄는 어떤 힘이 인물들의 파사드를 통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파사드를 통해 인물들의 관계, 성품, 삶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렇듯 인물의 전면에서 강력한 그 무언가를 발견해야만 비로소 파사드가 구현되는 것이다.

 

나는 나를 찍는다.

셀프 포트레이트는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는 자화상을 이르는 말이다. 처음에 이말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조각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꽤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나중에는 '스스로 자신의 형상을 찍는다'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이 세 정의에는 모두 '주체가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는 행위'라는 뜻이 있다.

오상택의 <자화상>이라는 사진에는 자화상의 두가지 의미인 '스스로 자신을 비춰 보는 행위'와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자 하는 행위'가 동시에 들어 있다. 여기엔 작가는 거울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작가는 거울 앞에서 자신을 찾는다.

그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다. 마치 타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라는 듯 스스로를 내던진 형상이다. 또 그는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드러냈지만 혼자가 아니다. 자신이 찾고자 하는 존재의 원형이 지금 텔레비전 화면에서 발현되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또 다른 자화상에 자신의 내면을 각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셀프와 포트레이트의 결합, 즉 자화상이다.

 

찍은 사진과 만드는 사진

사진의 주요 형식에는 구성과 조형이 있다. 이 두가지 요소는 비슷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먼저 구성은 화면 안, 즉 프레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적 형식이다. 이에 비해 조형은 화면 밖, 즉 카메라 밖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적 형상이다. 사진의 경우 구성은 자유로우나 조형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사진은 조형의 자유로움을 얻기 위해 언제부터인가 일탈을 감행했다. 또한 뉴웨이브 사진가들은 사진의 형식을 또 다른 의미의 구축과 해체라는 용어로 구분했다. 구축은 사진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일어나는 구성적 형식을 말하고, 해체는 사진이 만들어지기 이후에 일어나는 조형적 형식을 말한다.

구본창의 <태초에>라는 사진은 진정한 형식은 어느 시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계속되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또 그의 사진을 보면 작가가 렌즈 안에서 수동적이고, 구성적인 형식에 머물러 있지 않고 렌즈 밖에서 능동적이고, 조형적인 형식탐험을 계속했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사진의 형식은 주어진 구성에서 벗어나는것 "자신에게 적합한 시점을 획득하는 것"이다.

 

정신이 먼저 벗는다.

성은 모든 것이 다 드러나지 않을 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한때 <플레이보이> 사진기자가 최고로 인기 있었다. 에로티시즘의 정수를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는 최고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플레이보이>는 포르노 잡지라고 감히 말할 수 없는 누드의 격, 예술의 격을 지녔던 잡지였다. 누드가 아름다운 성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모델의 혼이 내재되어야 한다. 누드회화가 수백 년의 역사속에서도 여전히 사랑받고 또 지속되고 있는 것도 모델과 화가가 한마음이 되어 모델의 정신을 화폭속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누드, 에드워드 웨스턴의 누드, 해리캘러핸의 누드가 여전히 누드사진의 전설, 교과서라 불릴 만큼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모델들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아내 혹은 연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올바른 누드사진은 마음으로 벗는 것이며, 마음은 육체를 통해서 발현된다. 이미현의 <케리 시리즈>라는 한장의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작가와 모델사이에 감정적 교류가 충만하고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비례, 균형, 양감, 명암대비, 색조 등 모든것이 완벽한 누드사진이다. 예술로서 누드사진이 어떠해야 하는지, 아름다운 성으로서 에로티시즘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이미현의 사진은 고전적 누드의 전형이다, 광선에서 모델의 자세까지, 그리고 정신을 담은 육체까지 사진은 고전적 누드의 전형을 보여준다.

 

얼어붙은 시간의 세계

사진은 시간의 형상이다. 시간에 의해 탄생 되고 죽는 것이 사진의 숙명이다. 롤랑바르트는 사진은 찍는 순간부터 죽음이라고 했다. 시간이 동결되어 그 순간은 영원히 과거로 남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사진 용어 중에는 시간의 죽음에 대한 것들이 많다. 이미지라는 말의 어원인 라틴어 이마고는 원래 '유령'이라는 뜻이다. 또 형상이라는 뜻의 영어 피규어, 즉 라틴어의 피구라라는 말도 본디 귀신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사진은 시간으로 배태되고, 또 그 시간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는 지극히 본질론적인 접근이 아주 오래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소설가 이청준은 <시간의 門>에서 사진을 '시간의 문'으로, '실종의 욕망'으로 바라보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케메라와 사진을 각기 다른 시간, 다른 즉음으로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을 회상의 거울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시간 때문이다. 시간이 사진의 비밀을 푸는 방법이고, 사진의 본질을 찾아가는 방법이다.

박홍천의 <경포대>라는 사진에 대해 미술평론가 성완경은 "시간의 퇴적, 풍경의 죽음"이라고 적절하게 표현했다. 그의 사진은 시간의 색이 중요하다. 색은 사간의 삶과 죽음의 또 다른 징표이다. 색은 시간이 살면 생생히 빛나지만 죽으면 퇴색한다. 성완경은 이에 관해 멋진말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사진은 빛의 예술이면서 동시에 빛의 소멸에 관한 예술이며, 피사체의 존재에 의존하는 예술이면서 또한 그 피사체의 죽음에 더욱 의존하는 예술이다." 

 

빛은 색을 만든다.

색에도 궁합이 있다. 알베르티는 지수화풍의 네 가지 색을 원초적인 고유의 색으로 보았다. 이 세상의 유일한 색은 지구상의 4원소, 즉 흙, 물, 불, 바람의 색이며 그 나머지 색은 모두 그 고유한 색들이 서로 수용하고 관계를 맺어 만들어 낸 색이다.

빛은 사진을 만들 듯이 색을 만든다. 똑같은 색이라도 그 위에 빛을 비추거나, 그림자를 드리웠을 때 색은 달라진다. 이러한 색의 조화를 칸딘스키는 '색채언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색에는 그 색깔마다 소리가 있으며 그것은 인간의 정감속에서 언어로 나타난다고 했다.

권태균의 <무제>라는 사진은 자연의 색들이 어떻게 빛 속에서 서로 수용하고 관계 맺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사진은 화려한 색이 아니라 모든 것이 둥글다는 것을 표현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꽃밭에서 엄마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렇게 색은 사람의 마음까지 연주하고 있는것이다. 또한 그의 사진에서는 색깔의 심성을 대변하는 '내적 필연성의 법칙'을 음미할 수 있다. 사진의 색은 결코 색 자체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또 빛 자체만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컬러 콘셉트란 바로 빛 속에서 색이 어떻게 수용되고 관계 맺는가를 아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만이 색을 이야기하고 표현할 수 있다.

 

호흡만큼 깊은 사진

사진의 깊이는 보는 자의 호흡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을 '거리두기'라고 하는데, 보는 자에게 심리적인 거리감을 주고 그 깊이에 따라서 느낌을 새롭게 한다. 피사계심도라고 하는 이와 같은 사진의 깊이는 필연적으로 보는 자의 심리적 경계선, 바로 대상에 대한 심리적인 시점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조리개의 수치, 렌즈의 초점거리, 그리고 대상과의 거리에 따라서 결정되는 화면의 깊이는 관객의 호흡과 심리적인 거리, 그리고 시점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진형식이다.

독일의 사진가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사진에서 깊은 화면, 그래서 더 중심이 없는 화면, 오직 주변만 존재하는 화면은 철저히 대상과 사물을 객관화한다. 대상이 가장자리로 물러나고, 점차 작아져 중심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순간 시점은 객관적으로 바뀐다. 그의 깊은 화면은 클로즈업과 얕은 피사계심도로 그동안 잃었던 순수한 인간의 눈을 되찾게 한다. 강재훈의 <들꽃 피는 학교>, 이광모의 <아름다운 시절>,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사진에서는 구축됐던 대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그리고 깊이 있게 이해 시키고 있다. 또한 대상이 주변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관계를 맺는가를 조망하고 있다.

 

의미의 선택

초점은 거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물리적인 운영 체제다. 먼저 인간의 초점은 심리적인 영향, 더 큰 의미가 있는 그 무엇이가에 초점을 두게 된다. 이와같이 자연스러운 심리적인 작용 체계 때문에 인간의 눈은 '눈길을 준다'거나 '눈길을 건낸다', '본다'라고 표현한다. 렌즈의 초점은 광학적인 요소에 의해 결정되고 작동 메커니즘에 의해 결정된다.

이민영의 <무제>라는 사진은 '초점-형상-시선'이 어떻게 물리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관계하고, 또 작동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의 사진이 강한 감정적 울림을 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초점과 다른, 렌즈의 초점으로 생간 형산의 미묘함과 그에 따른 시선, 그리고 그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 정조 때문이다.

정상적인 인간의 눈은 결코 이런 초점을 가질 수 없고, 이런 형상을 만들어 낼 수도 없다. 따라서 초점을 결정하는 행위는 더없이 중요한 과정이다. 바로 이 선택에 의해서 다양한 사진이 만들어진다.

 

현실의 이편 상상의 저편

광학적인 판단이 우선하겠지만 초점 안에 있으면 인포커스라고 하고, 초점 밖에 있으면 아웃포커스라고 한다. 이 말은 초점 안에 있는 이미지는 형상적이고, 초점 밖에 있는 이미지는 비형상적이기 쉽다는 뜻이다. 노만브라이슨은 그 차이를 '형상적인 것'과 '담론적인 것'으로 구별했다. 브라이슨에 따르면 형상부재의 이미지는 사유적인 것, 상상적인 것, 이야기적인 것으로서 곧 문학이다. 사진은 대상을 정확히 재현해야 한다는 불문율을 좇다보니 어느새 또렷한 외양을 재현의 중심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자율성이 필요하다. 늘 원본에 종속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임유영의 <내 안의 풍경>은 초점에 의해서 얼마나 다양하고 미묘한 이미지가 결정되는지를 알게 한다. 또 원근법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한다. 전통적인 원근법이란 앞은 크고 선명하게, 뒤쪽으로 갈수록 작고 흐릿하게 나타나는 시각적 효과이다. 그러나 그녀의 사진은 전통적인 원근법을 흔들고 있다. 전경의 둔탁한 시멘트 구조물은 초점에서 벗어나있고, 저 멀리 보이는 마법의 성도 전경과 똑같은 초점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아웃포커스 된 흐릿한 임유영의 사진은 주체도 없고, 시선도 없는, 모리스블랑쇼가 말했던 "사라짐 속에서 진정 사라짐의 의미와 그 사실을 안다"는 말뜻을 뒤새기게 한다.

 

아우라, 교감회로가 열리는 순간

아우라는 순수의 환유이다. 그것은 순수를 대신한 이름이자 리얼리티의 존재, 리얼리티를 증명하는 순수의 순도이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자꾸 보면 싫증이 나는 것은 순수의 순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왜곡없이 진실을 담았다 해도 순수의 환유인 '아우라'가 존재하지 않으면 참된 순수사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우라'라는 말은 발터 벤야민에 의해 일반화 되었다. '회상의 회로'라고 정의했던 벤야민의 말처럼, 아우라는 작가와 관객이 감정을 공유하는 접점이며, 기억의 문을 여는 교감회로이다. 성두경의 <마포종점>이라는 사진에는 교감회로를 여는 중만한 아우라가 깃들어 있다. 이는 작가가 순수하지 않으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의 사진은 마치 앗제의 사진처럼 과거의 기억과 역사를 추적하는 회상의 세계를, 과거를 찾아가는 순수의식을 보여준다. 성두경의 사진이 초현실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강한 아우라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아우라야말로 가장 갈력한 교감회로라는 말이다.
 

같거나 혹은 다르거나

디지털은 시대의 대세이다. 이미 디지털 없이는 못 사는 세상이 되었다. 사진은 기술의 역사였고 언제나 진보된 기술이 새로운 표현과 새로운 세상을 보는 눈을 주었다. 문제는 사진의 리얼리티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 이미지 프로세싱이 무한 확장되면서 리얼리티 소멸 혹은 무력화 되었다. 디지털이 완벽한 새로운 사진의 모습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사진과 디지털릐 문제는 상보성의 문제이다.

최중원의 <스치던 풍경-올림픽 공원>이라는 사진에 감탄하는 이유는 도시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잘 표현 되었다는 점과 디지털 표현이 적절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과 도시, 자연과 인공의 문제를 요란하지 않게,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참된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사진의 사회적 본분이다. 그의 '스치던 풍경'은 연출도, 가상도 아닌 참된 우리 풍경이자 우리 모습이다. 놀라운것은 이 작품에 적용된 기법이 디지털 프로세싱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진에 디지털 기술을 적절히 가미했다. 사진과 디지털은 서로 자기 영역을 지키면서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상호 보완했다. 그래서 디자털의 도움으로 빛나는 작품이 되었다. 사진과 디자털의 만남은 서로 약한 부분, 강한 부분을 보태고 나누는데 의의가 있다. 사진과 디지털 간에 어떤 차별이 있어도 안 된다. 둘에게는 생성과 성질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진은 오로지 현실을 재현하기 자기 의무를 다하면 된다. 사진은 세상의 방이다. 영원히 우리 세상을 담는 영원한 방이다.

 

사진의 길과 격

평론가들은 사진의 충위 혹은 격을 규정하는 틀을 가지고 평가한다.

첫째 '사진'이라고 하는 것은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말한다. 둘째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사진 중에서 작품의 요소를 갖춘 사진들을 말한다. 내용과 형식의 조형적 캐논에 부한한 사진만이 '작품'이 될 수 있다.  셋째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작품 중에서 정신적 캐논을 가진 사람들이다. 작가의 작품 중에서 특별한 표현법을 가진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 넷째 '미학'이라고 하는 것은 예술중에서 하나의 미적사조 혹은 표현의 경향을 이끌어 낸 사진으로 이론이 뒤따르는 예술 작품을 말한다. 다섯째 '역사'라고 하는 것은 미학 중에서 사진사에 길이 새겨지고 남겨지는 교과서가 되는 사진을 말한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삼등선실>이라는 사진은 기본적으로 사진에서 출발한다.

이 사진이 '작품'이 되었던 것은 형식을 보면, 갑판의 상단과 하단 그리고 그 사이를 경계 짓는 시선과 위계의 공간감이 잘 드러나 있다. 이 공간감을 통해 일등석과 삼등석 삶의 간극, 즉 위계에 따라서 달라지는 삶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예술'이 되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삶의 리얼리티, 즉 생생한 삶의 순간을 직접, 있는 그대로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진이 '미학'이 되었던 것은 현실감 넘치는 사진, 생생한 현실의 모습을전 세계에 확산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진은 20세기 사진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진으로 사진사 교과서에 빠짐없이 나타나면서 '역사'가 되었다. 20세기 사진이 이 사진에서 출발한다고 할 만큼 전 세계 모든 사진가들이 인정하는 역사적인 사진이 되었다.

 

 

 

출처 : 사진모임 2008
글쓴이 : 백수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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