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장의 사진 미학
2부 한 장의 사진을 읽다 존재 증명 부재 증명 ~ 게스투스, 소외효과
존재증명 부재증명
어떠한 사진도 죽음, 그 부재함에서 벗어날 수 없고, 또 어떤 사진도 실존, 그 존재했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사진은 누가 뭐래도 '그때-거기에' 있었지만 '지금-여기에' 없는 동결된 역사의 신화, 지나간 시간의 증거이다. 사진은 존재와 부재에 대한 신화 바로 그 자체이다. 김아타(김석중)의 <인간문화재 하보경 옹>이라는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을 보면 또 하나의 사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속의 사진은 서름 무렵에 찍은 하 옹의 사진이다.
두 사진을 통해서 아주 명료하게 사진의 '존재증명'과 '부재증명'을 체현하게 된다. 1990년에 찍은 이 사진이 우리에게 주는 일차적인 이야기는 당연히 존재증명과 부재증명에 관한 것이다. 사진은 영원한 과거이며 미래에서 보면 언제나 죽음이라는 뜻이다. 누구나 사진은 역사를 동결하는 기술이라고 했다. 또 사진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낙엽이 되어 서재에 쌓이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렇듯 사진은 항상 '거기 있음'에 대한 기표이며, 궁극적으로는 '지금 없음'에 대한 기의이다. 이처럼 사진은 존재한 대상을 한순간에 멈추게 하는 시간의 죽음이기에 존재증명과 부재증명의 신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진은 신화다.
신화란 '하나의 이야기' 혹은 '하나의 특수한 언술'이다. 상징을 통해 말하는 함축된 의미의 세계다. 우리는 신화 속에서 살고, 또 그 신화속에서 숨을 쉬는 영원한 신화의 주체들이다. 롤랑 바르트는 신화란 '커뮤니케이션'이며 '의미작용의 형상'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신화가 이미지와 담론으로 치환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특별하고 제한적인 것이어야 한다. 사진이 신화가 될 수 있는 것은 기호와 이데올로기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형상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유효한 서사극이기 때문에 사진이야 말로 신화 중의 신화이다.
최광호의 <나는 사진이다>라는 사진이 있다. 신화를 직접 몸으로 보여 주고 있는 이 사진의 주체는 성경 <출애굽기>에서 하느님이 모세에게 했던 말 "나는 곧 나다"를 "나는 사진이다"로 치환하고 있다. 이 사진은 오늘날의 신화란 무엇이며, 사진이 어떻게 신화를 재현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사진을 신화의 본보기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주체가 '나는 사진이다'라고 신화화했기 때문이다. 신화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미지가 일인칭 주어이다 '기호적 자아'여야 한다. 이 사진에서 주체는 딸과 함께 기호적 자아로 나타난다. 신화는 대개 차갑다. 종종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진정한 신화는 거짓도 고백도 아니며 아무것도 과시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뿌리, 존재의 증표
일반적으로 결혼사진은 두 사람이 만나 '백년해로'를 약속한 증표의 사진이다. 그리하여 부부가 됐다는 증거의 이미지이고, 자식, 손자라는 또다른 '존재의 뿌리'를 확증하는 사진이다. 1930년대로 추정되는 한장의 혼례사진이 있다. 사진속에는 당시 시대적 정황을 보여 주는 여러가지 정보들이 들어있다. 30년대는 일제 강점기였고, 아직 신식 결혼이 일반화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식장도 없고 사진관도 귀한 시대였다. 그렇다고 보면 아주 잘사는 집안, 고관대작의 결혼식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서구의 신식 결혼은 실내에서 거행되고, 실내이다 보니 인공적으로 무대가 꾸며진다. 그렇기에 그곳에는 역사도, 문화도, 삶의 모습도 없고 인륜지대사라는 공동체의 모습도 없다. 반면 구신 결혼은 무대가 자연이고 사람과 자연이 어울린다. 구식 결혼식장은 곧 삶의 모습이다. 이렇게 초자연적인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시대와 삶의 정황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다.
정진국은 자신의 책 <잃어버린 앨범>에서 우리의 구식 결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떨리고 얼어붙은 순간, 평생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 두려움과 수줍음의 순간, 한 번쯤은 어눌해지고 얼굴을 붉힐 수 있는 권리가 구식 결혼사진에 있었다."
사진에게 말 걸다.
사진 해석에 필요한 가다머의 '지평융합'은 바로 언어 혹은 비언어 예술 작품을 읽으려고 하는 관람자가 맨 먼저 지녀야 할 마음의 자세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사랑이고 이해이고 개방이다. 요컨대 사진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해석자가 개방적인 사고로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주체(작가)와 객체(관람자)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들이 제거되어 서로 진실하게 만날 수 있다. 사진을 해석하는 것은 곧 사진에게 '말을 걸고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그것을 보는 자의 사랑과 이해를 전제로 하는 말 걸음과 귀 기울임인데 이것이 가다머의 지평융합, 이른바 '영향사'의 원리이다. 타인의 사진을 본다는 것은 사진을 찍은 작가의 본래 의도를 본석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이다. 그렇게 귀를 기울여야 사진이 전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가다머의 해석학이다. 가다머의 해석학은 해석을 작품의 이해로 규정한다. 오로지 이해하고 우리에게 제기하는 물음만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진정한 해석은 사진을 이해하는 자의 관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성남훈의 <소록도>라는 한장의 사진이 있다. 이 소록도는 일반적인 해석학의 원리, 즉 객관적이고 정확한 해석을 요구하는 딜타이나 허쉬식의 해석학이 적용되기 어렵다. 이 사진은 관람자에게 역사를 먼저 알고 보라고, 선입견을 갖지 말라고 어떠한 요구도 부탁도 하지 않는다. 이 사진은 해석을 바라는 사진이 아니라 이해를 바라는 사진이기 때문이다.
가다머의 해석학처럼 소록도 나환자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출현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재현의 정치학
한 장의 사진을 들여다볼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곳은 사진의 표면이 아니라 표면 너머의 숨은 진실이다. 이 시대의 대표적 재현 매체인 사진에도 화자인 사진가의 숨은 진실이 있다. 세계적인 사진가 듀안 마이클은 "비밀이 많은 사진일수록 재밌고 좋은 작품"이라고 했다. 그의 말은 사진은 그만큼 비밀을 감추기 어렵다는 뜻이되고, 그래서 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이 결국 작가가 숨겨놓은 비밀을 캐내는 일이라는 뜻도 된다. 재현의 정치학이란 사진의 의미화 방식이자 재현의 실체라고 이해하면 좋은 것이다. 재현의 정치학에는 '이데올로기'가 중심에 있다. 사진의 비밀이란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진을 감상한다는 것은 독해, 즉 이데올로기를 해독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주하의 <사진적 폭력>이라는 한장의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이데올로기가 곧바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해석이 쉽지 않은 작품이다. 즉 이데올로기를 찾아내기 어렵다. <사진적 폭력>이라는 제목을 알고 사진을 보면 수전 손택이 말한 사진의 폭력성을 이해하는 독자라면 이 사진적 폭력이 그녀의 사진적 폭력성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거기에 유사한 이데올로기가 내재해 있을지 모른다는 정도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왜 드러내려 하는지는 알아채기 어려울것이다. 이 사진의 주체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위치가 드러나고 침해받는 것에 무언의 이데올로기적 긴장감을 표출하고 있다. 이 사진에서 '나'와 '너'는 찍히는 사람과 찍는 사람의 관계를 넘어 사회와 문화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수많은 개인들 간의 긴장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또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가 맞부딪힐 때 어떻게 적의를 드러내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보자면 너와 나의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가 투쟁하고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플레시를 사용하여 배경을 밀어내고 주체의 발화 행위를 강조했던 것과 함께 고도의 '초점화'전략이다. 초점화 전략은 주체의 이데올로기를 보다 확실히 드러내려는 상징의 체계이다.
이렇듯 <사진적 폭력>은 주체가 타자에게 어떤 모습으로 저항하고 또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수호하려고 하는지를 보여준다.
정치적 풍경, 그 우울한 대상들
정치적 풍경사진이란 풍경 속에 보이지 않는 정치적 요소와 상징이 들어 있는 사진을 일컫는다. 미술에서 정치적 풍경이라는 말은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다. <정치적 풍경>의 저자 미술사가 마르틴 바른케에 따르면 정치적 풍경이란 정치적 비밀이 숨어있는 풍경이다. 자연풍경 혹은 편실풍경은 종종 통치자의 정치적 기호로 덧 씌워지거나, 때때로 다양한 계층 사이에 벌어지는 이해관계의 증거물이 된다.
홍일의 <기둥 시리즈>라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정치적 풍경을 설명 할 수 있는 아주 적절한 본보기이다. 이 사진은 현실적인 도로의 기둥을 보여 주고 있지만, 거기에는 '정치적 도로'를 위한 '기둥'이라는 명료한 정치적 상징과 무게가 내재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정치적 풍경은 필연적으로 권력과 대중 간의 정치적 역학 관계인 것이다. 정치적 풍경의 특징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진이 정치적인 풍경사진이라고 알아차리기 어렵다. 홍일의 사진처럼 복선을 깔고 있는 풍경,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명료하게 정치적 상징을 품은 사진이 현대적인 풍경사진이다. 현대적인 풍경들은 대체로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거나, 혹은 현실 속에서 변형된 모습으로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정확히는 구분할 수 없지만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따라 정치적 풍경, 사회적 풍경 혹은 문화적 풍경으로 나눠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프레임, 인식의 랜드마크
프레임은 시선과 시점에 의해 만들어지는 인식의 '경계표지'이다. 이는 프레임이 사진에 각양의 의미 작용을 실어 보낸다는 뜻이며, 그로 인해 고정불변이 아닌 가변적인 시각적 틀을 갖는다는 말이다. 프레임 안쪽은 드러나는 공간이며 프레임 바깥쪽은 삭제되는 공간 혹은 암시된 공간이다. 또 이미지 측면에서 보면 드러난 이미지는 부르면 대답하는 곳에 위치한 프레임 안의 시선이며, 드러나지 않은 이미지는 불러도 들리지 않는 곳에 위치한 프레임 밖의 시선이다. 사진가의 인식 틀에 의해 이미지는 프레임 안에서 살기도 하고 프레임 밖에서 죽기도 하는 것이다.
김상길의 <기념사진>이라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카메라 옵스큐라적인 이 사진은 여름날 오후의 도시풍경을 보여 주고 있다. 먼저 프레임을 보면 일상의 무료함과 그 무료함에서의 일탈을 꿈꾸는 '공제 선상의 때 낀 비둘기'같은 우리의 자화상이 투영되어 있다. 어둠 이쪽에서 밝은 저쪽까지 날아가는 것은 사회적 공간에 대한 깊은 인식의 틀이다. 사진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프레임이다. 프레임의 형에서부터 화면의 깊이, 넓이, 인물의 자세에 이르기까지 사진의 프레임은 용의주도하게 설정되어 있다. 그의 프레임은 또한 사진가의 '시선'이 어떻게 의도적인 '시점'으로 옮겨가는가를 보여 준다. 우리가 이 사진을 평시와 다른 사진으로 바라보는것은 원초적인 사진 이미지와 롱샷 때문이다. 작가는 카메라 옵스큐라 프레임을 통해서 일상을 노출시킨다. 이 사진의 프레임은 인간의 삶이 참으로 한순간에 넣고 빠지고, 다가가고 멀어지는 다층적이고도 결정론적인, 마치 카메라의 인식 틀과 같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상길의 사진처럼 인식의 틀은 곧 사진의 프레임이다. 그런 점에서 시진의 프레임은 영원한 인식의 랜드마크이다.
추상, 그 변화무쌍한 생명력
포스트구조주의자 들뢰즈는 추상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을 조형과 형상으로 나누었다. 들뢰즈는 추상에 대한 새로운 사유 방식을 요구하면서, 추상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진정한 추상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또 그래야만 추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으며, 진정한 추상을 창조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추상은 구상의 반대도, 구상과의 단절도 아닌, 구상의 혼성과 중첩일 뿐이라는 논리를 편다. 들뢰즈의 추상적 기계는 다름 아닌 변화무쌍한 한 그루의 '거대한 나무'이다. 그는 이 '거대한 나무'를 통해서 "에너지가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추상이다. 그들은 무구속적이고 탈중심적이다. 그것은 개연성이 없이 우연히, 형식 없이 작동하는 순수한 자율성이다." 민병현의 <잡초>라는 사진은 진정한 추상이 무엇인지를, 추상사진의 참 의미를 설명하는데 아주 적절한 본보기이다. 그의 사진은 들뢰즈의 추상적 기계에서 보면 나뭇가지라기보다는 나무뿌리로서 '그리고'를 진행하는 자율적인 형상이며, 또 구상이 혼성되고 중첩되어 생겨난 추상적 공간이다.
들뢰즈는 후일 추상론을 정리하면서 추상을 생각할 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데카르트의 추상보다는 무한정한 존재 방식을 추구했던 자연적인 스피노자의 추상을 고려하라고했다. 인공적인 형태보다는 자연적인 형상이 더 올바른 추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바로 추상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것 같다.
게슈탈트, 감정을 일이키는 선
게슈탈트라는 말은 지각 혹은 형태 심리학이라는 뜻이다. 이 독일어는 인간의 지각적, 심리적 반응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현대의 시지각적 이론을 말한다. 이 이론 중심에 '선'이 있으며, 선에 의해 이끌어지는 지각적, 심리적 분석이 바로 게슈탈트 법칙이다. 따라서 이 게슈탈트 법칙에 입각하여 사진을 찍으면 훨씬 더 형식과 내용이 풍부한 시진으로 만들 수 있다.
조성호의 <선>이라는 한장의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게슈탈트적인 선에 의해 우리의 지각과 인식이 어떻게 열리고 또 확장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사진의 선(줄)은 단순한 선이 아니다. 지각을 확장시키는 선인데 이것이 게슈탈트 이론의 핵심이다. 또 인식을 확장하는 선인데 게슈탈트 이론에 의하면 선은 마지막으로 인식을 확장시켜야 한다. 이 사진속의 선은 소와 사람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긴장과 상대적인 숙명을 상징한다. 사진을 살리는 선이 바로 케슈탈트적인 선이다. 감정이 있고, 강한 울림이 있는 선이 게슈탈트적인 선이다. 사진의 선은 단순한 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게스투스, 소외효과
복제 혹은 재현이라는 이름의 소외는 사진의 숙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처연한 소외이다. 사진의 소외를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이 게스투스이다. 게스투스는 라틴어로 태도, 몸짓을 뜻하는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한 사람이 취하는 운동, 행위, 표정, 언어, 억양 들을 나타낸다. 사진에서 소외효과가 발생하는 순간은 게스투스를 통해서 의미가 전달될 때이다. 게스투스는 '현실 묘사'의 방법이라기보다는 '현실파악'의 방법이다. 이와 유사한 바르트의 푼크툼은 아주 작은 부분이 상처가 되어 주목하게 만드는 '환기'를 말한다. 게스투스와 푼그툼의 공통점은 소외된 작은 세부가 오히려 주목하게 만든다는 인식적 특징을 갖고 있다.
오형근의 <루이지애나 경찰>이라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이사진의 소외를 잘 대변하는 게스투스의 적절한 본보기이다. 이 낯선 사진을 이해하는 일은 연장선상에 있는 <아줌마>시리즈를 해석하는데 단초가 된다. <루이지애나 경찰>에서 푼크툼적 요소는 반짝이는 휘장과 신분을 말해 주는 견장이다. 견장은 그의 사회적 위치를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전체의 일부분인 휘장과 견장이 강력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 바로 푼크툼이다. 사진에서 푼크툼은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눈길을 끌지 못한 것들이 두드러지는 것인데, 그의 <아줌마>사진 중에서 <진주목걸이를 한 아줌마>, <팔장을 낀 아줌마>, <꽃 브로치를 한 아줌마>처럼 플래시 불빛을 받아 삶의 의미가 강조되고, 확장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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