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디 셔먼의 자화상
신디 셔먼에게 있어서 홀월즈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1975년 로버트 롱고, 낸시 드와이어 그리고 찰스 크로프드와 함께 변두리 허름한 얼음공장을 임대하여 한켠에는 침실, 다른 한켠에는 작업실과 전시공간으로 홀월즈를 만들었던 셔먼은 이곳에서 여러 가지 예술장르의 실험과 자신이 장차 지향해야 할 예술세계를 구축했고, 1980년 뉴욕 소호로 진출하기 직전까지 로버트 롱고와 삶을 함께 했었다. 그만큼 홀월즈는 신디 셔먼에게 있어 세계를 향한 첫 예술무대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1975년 당시 신디 셔먼은 버팔로소재 뉴욕 주립대학(BSC)에서 순수예술을 전공하는 4학년 학생이었다. 신디 셔먼이 공부했던 바로 그 예술학과에서 필자가 공부한 까닭에 그녀의 재학시절에 관한 정보나 자료들을 비교적 소상히 접할 수가 있었다. 당시 셔먼을 지도했던 교수들에 의하면 그녀는 제작하는 작업이나 사고와는 달리 실제로는 말이 없고 수줍음이 많았던 학생이었다고 한다. 신디 셔먼은 사진전공은 아니었지만 사진에 관심이 있어서 여러 사진강좌를 선택해서 공부했으며 그중 몇 강좌는 레슬리 크림스(Les Krims) 교수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레슬리 크림스 교수에 의하면 당시 그녀는 회화나 조각같은 순수예술보다는 사진을 이용한 퍼포먼스에 보다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
1976년은 신디 셔먼이 예술계에 첫 진입한 공식적인 해이자, 그녀의 예술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해다. [제 35차 서부 뉴욕전]에 이어 [제 36차 서부 뉴욕전](1976)의 참가 신청서가 말해 주듯이 그녀는 전무했던 경력에서 도합 세 번의 그룹전을 거쳐 최초의 개인전을 홀월즈에서 갖는다. [자작극(Play of Selves)]이라는 제목의 퍼포먼스였지만 사진의 비중을 강조한 전시회였다(사진3). 이 전시는 학교를 갓 졸업한 그녀의 첫 개인전이였던 만큼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되지 못했으나 처음으로 그녀의 예술개념을 밝히고, 이후 현대미술을 종횡무진할 첫 시발점이 된 무대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1980년에 신디 셔먼은 [무제, 필름스틸]을 통해 뉴욕 예술계(소호)에 등장했다. 그렇지만 작품이 처음 발표된 곳은 알려진 것처럼 뉴욕 소호의 더 키친 화랑(The Kitchen Gallery)은 아니다. 데뷰작 [무제, 필름스틸]이 전시된 순서는 휴스톤 현대미술관(1980년 2월)이 가장 먼저이고 텍사스 화랑(1980년 2월)이 그 다음, 이후 뉴욕 소호의 더 키친 화랑(1980년 3월)과 메트로 픽쳐스 화랑(1980년 4월) 순이다. 데뷰작이자 히트작인 초기 [무제, 필름스틸]은 50년대와 60년대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B급 영화를 모방해 만들어졌다는 소문 때문에 가장 빈번히 그리고 오랜 기간에 걸쳐 화제거리를 제공해 왔던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실제 배우를 닮은 그 친숙한 이미지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사랑받고 또 널리 알려진 대표작이다.
반면에 정작 유명한 나머지, 왜곡 또한 많은 것이 이 작품이다. 이를테면 이 작품이 영화의 특정 장면을 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과 그렇지 않다. 오래전에 그녀 자신이 [아메리칸 포토(American Photo)]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총 80여점에 달하는 사진들은 실제 영화의 장면이나 제작된 포스터, 혹은 영화관련 출판물에서 어떤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녀의 순수한 아이디어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낯설지 않은 이미지 때문에 생겨난 이러한 대중들의 착각은 비평가들에게까지 '리얼리티 모사효과'라는 구조주의 문화이론의 특정 사례로 비약되기도 했다.
[무제, 필름스틸]과 관련된 또 하나의 왜곡된 사실은 신디 셔먼의 촬영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셔먼이 직접 자신을 찍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촬영방법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편이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20년 동안에 제작된 그녀의 작품들은 전부 자신이 직접 모델로 등장한 사진들이다. 따라서 그녀가 어떠한 방식으로 사진을 제작하는가에 대한 의문, 즉 촬영 방식과 이에 따른 미학적 문제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사진들은 대부분 타인이 찍은 사진이다.
[무제, 필름스틸]의 경우도 특정 상황을 제외하곤 타인의 도움으로 촬영된 것이 많다. 그녀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들은 작품집에 나타나듯이 많은 숫자가 아니다. 작품을 주의깊게 살펴본 사람이라면 그녀가 케이블 릴리즈를 이용해 찍은 몇몇 상황들을 아마도 알아챘을 것이다. 셔터를 누르기 위해 케이블을 이용한 장면은 작품번호 #6, #9, #10, #11, #33, #34 그리고 #35에 나타난다. 이것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대다수 사진들은 타인에 의해 촬영된 것이다 히치 하이커를 주제로 했던 작품 #48, 즉 <무제, no. 48>(1978)은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중의 하나인데 이 사진은 그녀의 아버지에 의해 찍혀진 것이다.
당시 신디 셔먼의 이러한 제작 행위는 당시 논란을 불러왔다. 전통적인 사진개념과 모더니즘 미학에 따른 사진의 독창성 문제가 제기됐는데, 창작의 주체를 가리기 위한 "실제 촬영자가 누구인가"를 묻는 그 고답적인 미학논리가 사진계에서 나온 것이다.논란은 곧 시들해졌지만 사진계와는 달리 미술계에서는 그녀의 제작행위에 대해 어떤 비난이나 문제의 제기가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신디 셔먼은 그때부터 "나는 사진가가 아니라 아티스트로서, 최종적인 이미지를 위해서 카메라와 함께 한다"고 주장했고, 어떤 장소에선 간에 자신은 사진을 회화와 마찬가지로 표현매체의 일부로서 인식하고 있음을 줄곧 밝혀왔다.
신디 셔먼의 연출 방식은 그녀의 성장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셔먼은 1954년 뉴저지에서 태어나 주로 롱 아일랜드에서 자랐는데 대부분 유명인들의 이력들이 그러하듯이 그녀에게도 예술과 관련한 몇가지 과장된 스테레오타입이 그녀의 어린시절을 미화하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어린시절부터 거의 타고났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분장 실력이 뛰어났고 그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는 점은 사실인 것같다. 왜냐하면 그녀가 지금까지 자신의 얼굴을 수백가지 다른 얼굴로 분장하면서 특별히 누군가로부터 분장지도를 받은 사실이 없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그녀의 선천적인 분장 실력은 그녀의 연출 방식과 충분히 연계되었다고 하겠다.
당시 예술적 상황을 그녀의 초기 예술세계와 관련지어 살펴보면 그녀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즉 70년대 중반 뉴욕의 예술적 경향은 60년대 후반부터 확산된 미니멀리즘, 퍼포먼스 그리고 개념미술이 뒤섞인 대단히 혼재된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정치,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도대체 언제 어디서 어떤 것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튀어나올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이러한 아방가르드 예술적 상황에다 그녀가 공부했던 버팔로(Buffalo)가 당시 우드스탁과 더불어 뉴욕 히피의 본거지였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조금더 그녀의 예술행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시절 신디 셔먼은 당시 개념미술가로서 이름을 떨쳤던 윌리암 웨그만, 브루스 노만, 길버트와 조지, 엘리노아 엔틴 그리고 보토 애콘신 등에 빠져있었고, 사진과 관련해서는 데이비드 호크니, 척 크로즈, 존 발데사리, 그리고 로버트 커밍의 작품에 관심이 많았다.
신디 셔먼은 초기부터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주제로 다뤘다. 그 때문에 그녀에 대한 비평은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극단적으로 치우친 경우가 많았다. 극단적이고 왜곡된 비평은 종종 그녀를 고통에 빠지게 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녀가 특정 미디어나 비평가를 기피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1980년부터 1995년까지 근 15년 동안의 신디 셔먼과 관련된 비평들을 분석해 보면 양도 양이지만 너무나 다양하고 때론 구차해 보이기조차한 비평에 놀라게 된다. 그녀에 대한 비평이 이처럼 다양성을 보이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녀가 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인데, 모든 비평가들이 그녀를 포스트 모더니스트 혹은 페미니스트로 몰고갔으며 그녀의 작품을 철저히 성과 권력으로 관련지어 보았다.
작가의 개념에 따라 비평시각이 변하고 비평가의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작가의 생각을 넘어서서 지나친 논리를 전개하거나 작품과 무관한 내용을 공론화 시키는 일은 작가로 하여금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신디 셔먼의 경우도 이러한 범주에 포함되는데 그녀는 지금까지 수많은 인터뷰에서 작품에 대한 해석 요�에 시달려 왔고, 기대한 답이 아니면 곧장 왜곡된 기사와 비평에 곤란을 겪기도 했다. 그녀가 한 인터뷰를 통해서 "도대체 작가는 관객들에게 작품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해석의 책임이 있는가"를 스스로 반문할 정도로 딜레마에 봉착한 일이 있다.
신디 셔먼의 전략적인 측면,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 전략은 그녀의 작품을 분석하는데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다. 왜냐하면 분명히 그녀는 페미니스트 아티스트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략을 수행했던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가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녀가 왜 모더니즘 예술가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이 보다 빠르고 쉽게 답을 제공한다. 신디 셔먼의 혼성모방 전략이나 독창성 해체 전략은 후기 구조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확실히 모더니즘 예술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한없이 아름답거나 아니면 순전히 성적 대상물 자체였다. 그리고 모더니즘 미술에서 여성예술가들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나 사회적 스테레오타입을 비판하기보다는 남성 예술가들의 눈치를 살폈다. 즉 8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여성 예술가들처럼 여성이 직접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강력한 힘을 행사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바로 이 점에서 신디 셔먼은 작품해석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분명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략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 좋은 실예를 [무제, 역사 인물화(Untitled, History Portraits)](1990)'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셔먼의 작품 중 가장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에 부합된 작품으로서 전부가 미술사에서 도용한 이미지들이다. 메트로 픽쳐스 화랑에서 전시 되었던 총 20점의 [역사 인물화] 시리즈는 일단 과거 세리 래빈이나 바바라 크루거가 발표했던 도용 이미지에 비하면 내용도 한물 간 것일 뿐만 아니라 그 강도면에서도 훨씬 뒤쳐진 것이다.
'역사 인물화'는 고전주의 화가 피에로에서 시작하여 라파엘로, 홀바인, 고야, 그리고 엥그르에 이르기까지 미술사 시간에 슬라이드를 통해서 감상하는 역사적 인물화들이 신디 셔먼에 의해 도용된 작품이다. 그래서 대다수 비평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도용을 통한 오리지널리티 파괴', '고급예술(high art)에 대한 부정', '남성 예술가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 또는 '역사 인물화의 아이러니 폭로' 등으로 해석했다. 분명 신디 셔먼의 [역사 인물화]는 희극적이다.
그렇다면 신디 셔먼이 '역사 인물화'을 통해 진실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확실한 것은 과거 세리 래빈이나 바바라 크루거가 했던 것처럼 전적으로 원작에 대한 아우라의 파괴 즉 오리지널리티 파괴나, 남성 권위에 대한 도전, 아니면 몇점의 남성 포트레이트가 있기 하나 여성의 성적 희생을 상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푸생보다 더 정교한 구도와 카라밧지오보다 더 완벽한 조명, 그리고 렘브란트나 루벤스보다 더 화려한 색감을 통해서 인물화의 참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가 셔먼의 희극화된 작품을 통해서나마 진정으로 우상화되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체취를 가진 인간의 성상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녀의 '역사 인물화'는 과거 거장들이 제작했던 대작보다도 훨씬 더 인간적인 직품일지 모른다. 이는 마치 종교적 사관에 따라 현대문화를 통찰한 한스 로크마커 교수가 [현대예술과 문화의 죽음]에서 말했던 "인간의 통찰력과 인간의 이해, 나아가 인간적인 가치, 인간적인 진리에 의해 그려진 그림"처럼, 그녀의 [역사 인물화]도 비록 그것이 사진일지라도 인간의 눈으로써 이해하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재현한 역사화인 것이다.
'세계사진가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1년 상반기 한국사진의 동향... (0) | 2008.07.22 |
---|---|
사진사조 변화 - 조직과 단체 등을 중심으로 (0) | 2008.07.22 |
유진 스미스... (0) | 2008.07.22 |
사진가들... (0) | 2008.07.22 |
브레송... (0) | 2008.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