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진가탐구

으젠느 앗제...

kwendol 2008. 7. 22. 10:57
 

으젠느 앗제(Eugene Atget 1857 ∼ 1927 )


으젠 앗제는 20세기 사진가 중에서 그 정체성에 있어 가장 논란이 많았던 사진가이며, 또 그가 누구인지, 어떤 성격의 사진을 했는지  아직도 미학과 예술성에 있어 다른 견해가 있고,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사진가입니다.



으젠느 앗제(Eugene Atget 1856∼1927)에 대해서는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듯이 프랑스 사진가로서 지금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함께 현대사진을 개척한 대표적 사진가로 추앙 받고 있지만, '카메라의 시인'이라 불릴 만큼 그의 생애가 다분히 전설적인 데다가 사진마다 시적 정감이 풍긴다‘ 평생을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았으며 사진의 명성도 죽은 후에야 미국의 여류사진가 베레니스 애보트에 의해 유명하게 되었다는 정도이다.



◉앗제에 대한 평가와 그의 사생활은 적지 않은 신화로 만들어져 일종의 전설처럼 따라 다닌다. 그 신화들 가운데 가장 끈질기게 남아 있는 것은, "앗제는 1856년 프랑스의 항구도시인 보르도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려서부터 삼촌의 손에서 자랐다는 사실과, 열 살 넘어서 부터는 배를 타고 뱃사람의 잔심부름을 했으며, 스무 살 때에는 떠돌이 극단의 배우가 되었으나, 배우라야 단역에 지나지 않았고, 주로 무대 뒤에서 잡일을 거드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의 생활은 어둡고도 고달픈 것이었다. 언제나 가난에 허덕이고 내일이 없는 삶의 밑바닥에서. 그의 청춘은 찌들대로 찌들어 버렸다. 그러니 정식으로 결혼할 형편도 못 되고, 어쩌다가 열 살이나 위인 과부와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운의 나날을 보내다가 비로서 마흔 살이 갓 넘었을 때, 사진가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나아지는 것이 없어 늘 혼자서 고독한 존재였다.

본격적인 사진가로 입문한 그는 당시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살고 있던 파리의 몽파르나스(Montparnasse)에 작업실을 열고, 대외적으로는 직업으로 화가들과 건축가, 출판사 등에 제공하기 위한 자료용, 밑그림용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목적인 변해가는 파리와 그 근교의모든 문화적, 환경적 사진기록을 진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작업실 문에는 손으로 쓴 간판이 있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예술가들을 위한 기록'이라고 적혀있었다.

그가 수레 한 대를 밀면서 파리의 길거리를 돌아다닌, 거의 거지나 다름없는 떠돌이 사진사였다는 것과, 그가 자신이 하는 작업의 가치에 대해 무관심한, 아주 순박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에 사진을 팔고 다녔고, 스스로가 예술가로 자청하지 않았으며, 다만 화가들의 밑그림을 위한 자료로서의 사진을 제작해서 끼니를 연명했던, 그러나 그는 오늘날 스티클리치와 더불어 20세기의 여명을 여는 위대한 사진가의 반열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 말이다.


*앗제의 사진과 그의 여러 작업이 역사적으로 엄청나게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이유를 알려면 그가 주로 작업을 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유럽과 미국의 사진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작업의 양과 집념은 대단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의 사진은 오히려 단순하고 평범한 기록으로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적으로도 대단히 평이한 사진으로 보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앗제의 작업은 오늘날 평이하고 사진의 주류로 보이는 형태의 작업을 가능하게 한 정신적, 미학적 혁명을 성취하고 있다. 그가 활동했던 당시에 있어 사진의 주된 경향은 인간을 의도적으로 장식하고 포장해서 그들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부자연스러운 귀족의 모습으로 만들거나 도식적인 명함판을 양산하는 초상사진의 영역, 그리고 사진에 여러 가지 조작을 가해 피그멘트의 효과를 내면서도 사물의 인식체계는 여전히 17,8세기 낭만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예술 지향적 사진의 영역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이런 경향을 완전히 거부하고 현대사진의 이정표를 세운 앗제의 사진이 갖는 혁명적 성과는 곧 드러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진의 역사에서 앗제는 두 가지 부분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중 하나는 다분히 미국을 중심으로 생겨나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견해이며 비교적 최근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앗제가 오늘날 사진의 가장 중요한 영역인 현대 다큐멘터리 사진의 개척자이며 이전의 역사에서는 다분히 무시되어 왔던 사진의 기록적 가치를 사진사의 전면에 복원시킨 위대한 선각자라는 평가이다. 이런 시각은 앗제가 남긴 수천 장의 사진이 19세기대도시로의 급격한 변화과정 속에 있었던 프랑스 파리(Paris)와 그 근교인 일드프랑스(Ile-de-France)지방의 세부적인 모습을 백과사전적으로 그리고 정밀한 지도를 그리듯이 담담히 기록하고 있고, 또 이러한 기록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가 수반하는 인간의 소외-사실 그의 사진에는 사람의 모습이 얼마 없지만-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실제로 국과 유럽의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의 대가들 즉 베러니스 애보트, 워커 에반스(Walker Evans),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다이안 애버스(Diane Arbus) 등은 실제 앗제의 사진에서 자기 작업의 원형을 발견했고, 이를 토대로 작업의 형식을 만들어 가기도 할 만큼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특히 미국사진의 가장 위대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추앙받는 워커 에반스의 경우는 죽기 직전 ‘나는 작업 스타일에 있어서 내 자신이 앗제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그의 사진을 자주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게 남아있는 불안의 잔재이며, 앗제 사진의 위대한 장점과 그의 스타일에 대한 나의 두려움이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앗제가 사진의 방법론으로 고수한 ‘직설적 사진(straight photography)’의 엄격함 그리고 일정한 지역을 사진의 대상으로 하면서 추구해나간 인간의 삶의 환경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오늘날에도 긍정되는 미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전형으로 그의 선구적 위치를 실감하게 한다.


앗제와 그의 사진에 대한 평가 중 또 다른 부분은 주로 유럽 특히 프랑스의 예술가들과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한 동안은 앗제에 관한 주도적 해석으로 자리 잡아 왔던 것으로서, 그의 사진작업이 1920년대부터 상당기간 세계 예술계를 지배한 주도적 흐름이었던 초현실주의의 선구이며 사진의 초현실적 성격을 잘 드러냈다는 해석이다. 원래 앗제가 초현실주의자들과 비평가들에게 알려진 것은 그의 이웃에 살던 정렬적인 초현실주의 사진가이자 화가였던 만 레이(Man Ray)에 의해서였다. 만 레이는 앗제의 작업을 자신의 동료들에게 알렸고, 1926년에는 당시 초현실주의 그룹의 기관지였던 "혁명에 봉사하는 초현실주의"에 앗제의 사진 4장을 수록하게 함으로써 그의 사진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물론 앗제 자신은 스스로 초현실주의자이거나 예술가로 불리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기관지에 사진이 실릴 때도 ‘내 이름을 거론하지 말아 달라. 내 사진은 단순한 기록일 뿐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가 초현실주의의 이념적, 도덕적 지형에 별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진이 알려진 후 초현실주의자들이었던 로베르 드노, 줄리앙 레비, 장 콕토 등은 앗제의 작업을 그들의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수행된 초현실주의의 원조로 평가했으며, 그들의 지도자였던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조차도 앗제의 작업을 선구적 시인 랭보(Rimbaud)의 작업등과 더불어 초현실주의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완성된 초현실성의 구현이었으며, 앗제를 고전적 초현실주의자의 한 사람으로 긍정하고 그의 독창적인 시각에 경의를 표했었다. 그리고 1927년 앗제가 사망한 이후부터 약 10여년에 걸쳐 그의 사진은 유럽에서 있었던 사진을 고급 예술의 차원으로 위치시킨 여러 개의 중요한 사진 전람회에 선보였으며, 현대 예술에서 사진이 나아갈 지향점을 밝힌 선구적 작업으로 남게 되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에 따르면 앗제의 사진은 사진이 발명된 이후 초기사진을 지배하고 있었던 "질식할 듯한 분위기"-사진의 특성을 무시하면서 사진에 무엇인가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려는- 를 일거에 소독한 모더니즘이라는, 그 이후 생길, 긴 대열의 전위대라고 할 수 있었다.



는 경제적 어려움과 주변의 평가에 구애받지 않고 그 후 1927년 사망할 때까지 일생동안 오직 파리와 그 근교의 완벽한 사진기록에만 매달렸다. 당시 유행한 예술사진과 살롱에 출품하는 유혹에 한 번도 빠져들지 않았고, 당시 유행에 크게 뒤떨어지는 오래된 장비를 사용하면서도 순수한 시각으로 대상을 찍어 나갔다. 그의 사진적 접근방식은 직설적이었고, 어떤 특별한 효과를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대상들을 기록해서 오늘날 사진사의 가장 위대한 성과 중의 하나인 6000여점 이상의 사진을 남겨 놓았다. 미술사가인 장 뤽 다발(Jean Luc Daval)은 그의 책 "사진예술의 역사"에서 앗제의 사진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다음과 같은 위대한 초현실주의자 데 키리코(de Cirico)의 말을 인용해서 평가했다. ‘중요한 점은 지금까지 예술에 포함되어 있던 친숙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즉 모든 주제, 사고 그리고 상징적 요소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그는 항상 18X24 cm 크기의 유리 플레이트로 작업을 했고, 광각 렌즈를 사용했으며 카메라의 앞부분이 위로 올라가게끔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그의 사진 중 일부는 사진의 윗부분이 렌즈의 이미지 밖으로 벗어나 있는 것도 있고, 또 그의 사진 대부분이 사진의 광학적 축 즉 원근법의 소실점이 화면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이 바로 다른 사진가들의 작업과 다른 앗제 사진만의 독특한 힘을 만드는 요인이 된다. 하지만 건물이나 길의 수직선은 항상 수직으로 뻗어 있다. 이는 앗제가 자신의 표현 의도를 위해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앗제가 남긴 사진의 상당수는 그의 죽음 직후 배러니스 애보트에 의해 수집되어 미국으로 건너갔고 현재 뉴욕의 근대미술박물관(MOMA)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유리 플레이트와 일부 빈터지(Vintage) 인화는 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에 보관되어 있다.


◉으젠느 앗제라는 이름이 최초로 예술계에 등장했던 상황은 그가 죽기 전인 1926년, 작업실이 근처에 있어 종종 앗제와 사진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화가 만 레이가 초현실주의 기관지 <초현실주의 혁명>에 몇 점의 사진을 선보였을 때이다. 그러나 앗제가 초현실주의 기관지에 소개되었다해도 그는 철저히 무명에 가까웠다. 앗제가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직접적 계기는 만 레이의 암실 작업을 도와주었던 미국의 여류사진가 베레니스 애보트가(그녀는 1925년에 앗제를 처음 만났다) 1927년 앗제의 죽음을 알고 그의 스튜디오를 찾아가 스튜디오에 남아있는 악 5천여 점의 네거티브를 미국으로 가져와 MOMA(1968년)에 팔고 난 후이다. MOMA가 이듬해인 1969년, 구입한 작품에서 일부를 전시함으로써 앗제는 곧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으젠느 앗제가 단순한 상업사진가가 아니라 좌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상업사진가라는 점은 우리에게 우선 동시대 지식인들의 보편적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모티프는 분명 앗제사진에서 빠져있는 중요한 문제점이다. 앗제가 프랑스의 부와 영화를 상징하는 에펠탑이나 개선문, 루브르 박물관, 사치스러운 오페라하우스, 대성당을 찍지 않았던 것이, 그리고 또한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인, 사업가, 공직자, 고급장교를 찍지 않았던 것이 앗제의 사회주의 시각과 막시즘적 이데올로기 때문이라는 것이 설득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앗제가 분명 삶을 위해서 사진을 찍고 영리를 목적으로 작업을 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이데올로기마저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비평가들의 시각이다.


앗제의 위대성은 그가 주제와 소재를 불문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발터 벤야민이 언급했던 것처럼 그는 사진을 사회적 기록으로, 문화적 증거로, 정치적 도구로, 그리고 경제적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인식은 사진을 주문 받고, 팔고 하는 지엽적인 문제와는 별개이다. 문제는 앗제가 대상으로 삼았던 주제와 소재들이 그저 무감각하게 주문대로 찍었던 것이 아니라, 철저히 사회적 이데올로기, 경제적 이데올로기, 문화적 이데올로기, 그리고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두고 접근하려 했다는 점이다. 사진의 발명동기가 철저히 정치적 산물이었음을 역사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선가 사진은 그것들을 포기하고 예술로 전환했다. 앗제는 바로 사진의 본래 모습, 즉 사진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되찾게 해준 장본인이었던 셈이다. 여기에 바로 앗제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 전혀 기술적 진보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앗제의 경우는 어떤 부재(不在)를 표명한다 : "마부도 승객도 없는 텅 빈 합승마차, 버려진 무게 화차, 손님도 점원도 없는 가게, 아무도 없는 길, 비여 있는 호화스러운 계단, 아무도 없는 카페의 테라스 그리고 정원과 뜰 그와 같이 앗제의 사진은 마치 인간이 빠진 연극 무대처럼 어떠한 생물도 없고 어떠한 분위기도 없다. 황량한 도시 공간은 마치 아직 새로운 세입자를 찾지 못해 비여 있는 집처럼 텅 비여 있다". 라고 발터 벤야민이 말하듯이 언제나 뭔가 빠져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떠한 의미적 해석을 부정하는 이상함 혹은 불안함의 실체 즉 푼크툼(punctum)이다. 그러나 문화적 코드로서 읽혀진 앗제의 사진에는 사실상 어떠한 푼크툼도 돌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사진은 문화적인 측면의 극히 평범과 진부의 극단성 즉 스튜디움(studium)을 표명하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R. Barthes)는 푼크툼을 "하나의 보충"이고 구체적이든 아니든 "그것은 내가 사진에 보태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이미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푼크툼은 또한 불완전함, 부족, 분명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 아직 없는 것, 여하튼 거기에 결코 없는 것이다. 앗제의 사진에서 "출현"은 문화적이고 코드화된 진부한 객관이다.


그것은 당시 프랑스의 사회적인 측면에서 읽혀질 수 있는 기록물로서의 가치이다. 그러나 앗제의 사진이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알 수 없는"영역인 비밀의 속삭임이다.


앗제는 범죄 현장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쥐 죽은 듯 조용하다. 그의 사진들은 어떤 징후를 드러내는 것 외에 아무런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앗제의 사진은 결코 "비어 있는"것이 아니다. "말없는 사진"이 우리의 기억과 환기를 통한 연상작용을 일으켜,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민방위 훈련때 도시의 텅빈 풍경을 상기해보자)


그가 사람들을 제거하거나 혹은 감추는 것은 의도적으로 "텅 빈 풍경"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대상의 모습을 충실히 담아 내기 위해서 그 대상과는 무관한 불필요한 요소를 화면 속에서 지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되지 않은 이러한 방법들은 후에 현대사진의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1970년대의 미국의 New Landscape의 경향, 독일의 베허스쿨, 등)


죽기 몇 년 전, 앗제는 초현실주의자이자, 다다이스트이고, 사진가인 만 레이(Man Ray)를 만났다. 그는 앗제의 집(몽파르나스의 깡빠뉴-프리미에르 가) 가까이에 자신의 아뜰리에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친구들인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 앗제의 사진을 꽤 관심 있게 보고 있었다. 이 전위적인 예술가와 작가들은 앗제의 사진에서 그들이 그토록 추구하고자 하는 초현실주의의 실현을 보게된다.

즉 사진이 가지고 있는 자동기술법(Automatizim)의한 우연성, 앗제 사진이 가지고 있는 "텅빈 풍경"의 매력등은, 그들의 초현실주의 운동 정신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앗제의 사진들 중 일부는 전통적인 관습에 의한 화면구성을 외면하고, 주로 비 예술적인 주제들인 평범한 주변의 일상들과 풍경이 아무렇지 않게 화면 속에 놓여져 있다. 그것은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어떤 기교도 없는 상태, 그러나 그 평범함이 정지된 시간 속에서 현실을 초월한 비현실의 늪으로 우리를 빠져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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