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사진의 시작에서는 크게 사진의 탄생, 사진의 비밀, 사진 산업, 초상 사진의 의미, 예술 사진의 황금기, 법정에 선 사진, 예술의 환영, 자연주의 사진, 살롱 사진으로 나뉘어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 발명적인 요소도 있지만 발견적인 요소가 더크다는 것이며 그 말이 역사적 문헌에 더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전제하에서 발견과 발명이 어떻게 다른지, 사진의 탄생 과정에서 논술된 글들과 역대 사진사가들이 쓴 문헌들을 찾아 사진의 '발명'과 '발견'의 의미를 설명한다. 사전적 의미로는 발명은 '전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낸것'으로 물리적.기계적 측면을 강조하며 발견은 '남이 미처 보지못한 원리 혹은 사물을 찾아낸 것'으로 화학적.수학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즉, 발명은 도구 중심적, 발견은 지리 중심적인 말로 해석된다. 사진이란 빛이 화학적 감광물질 위에 자연적으로 그린 그림이며,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카메라보다 화학적인 원리가 더 크게 작용했으며 먼저 카메라가 '발명'되었고, 이후에 이미지를 고정하는 사진적 '발견'이 있다는 의미이다. 사진은 1816년 니세포르 니엡스가 최초로 '발견'하고, 동업자인 다게르가 '발명'하였으며 파리 천문대장이자 하원의원이었던 프랑숭아 아라고에 의해 '발명품'으로 드러났다.
다게르는 자신의 '다게레오타입 사진술'을 완성하고, 돈벌이에 나섰으나 실패하여 아라고를 찾아가 사진술과 경제적 난관을 토로한다. 이때 아라고는 정치인의 감각으로 다게르의 사진술이 '불의 발명'에 견줄 만큼 엄청난 것임을 단번에 직감하여 국가가 특허권을 매입하도록 한다. 이로인해 어떠한 실익이 돌아올 것인지를 아주 자세히 그리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사진발명을 세계에 선포한 이래 재정수입의 폭발적 증가, 사진발명으로 인한 프랑스 과학의 높은 주가, 모든 시민들도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하여 아라고의 예측대로 사진은 프랑스에 엄청난 국가적 실익을 얻게 된다. 사진 탄생의 비밀은 혁명의 와중에 사진을 둘러싼 막전, 막후 당사자들 간에 발생했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해관계와 그 시대 부르주아 계급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근대정신의 발현을 살피는 일이며 '사진은 진보에 기여하고, 민주주의에 이바지하며, 누구나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아라고의 말을 재음미 할 필요가 있다.
사진으로 인생 핀 사람으로는 다게르, 나다르, 디스데리, 허셀이 있으며 이 세사람 모두 사진으로 명예와 부를 얻는다. 이 중 허셀이 발명한 정착액 하이포(염화은을 용해시키는 티오황산나트륨)가 없었다면 니엡스와 다게르가 영상을 잡지 못했을 것이며 허셀의 화학제조기술에 의해 '네거티브'와 '포지티브'라는 말과 '포토그래프'라는 말이 생겼다. 디세르는 한번 노출에 사진이 8~10장이 나오는 명함판 사진기법을 발명하였고, 나다르는 사진관을 차려 아무나 찍을 수 없었던 당시 부르주아 지식인, 정치인, 언론인, 법조인, 귀족, 상공업자, 지체 높거나 돈 있는 권력자 부호들을 대상으로 특화된 초상사진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사진으로 쫄딱 망한 사람으로는 니엡스, 바이야르, 탈보트, 르 그레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 니엡스는 전 재산을 탕진하면서 사진발명에 몰두했으나 사진발명권을 동업자 다게르에게 빼앗겼으며, 수십 년간의 엄청난 노력과 사진발명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세상을 떠남으로써 돈도 영예도 모두 다게르의 몫으로 돌아갔다. 바이야르는 선명하지 못한 종이 양화술로 다게르의 섬세하고 정교한 은판술에 밀려 관심받지 못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시체처럼 스스로 연출하여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최초의 셀프포트레이트' 사진을 제작했다. 탈보트는 특허권 신청과 세계를 향해 공표하는 것을 게을리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은 사진발명 2인자가가 되었으며 르 그레는 소량 고급화를 계속 지향하였으나 시대적인 이유로 문을 닫고 말았다.
사진의 역사는 184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를 '초상사진의 시대'라고 말한다. 초상은 시대를 지배했던 종교관과 세계관의 반영, 예술의 최고 주제가 되었으며 얼굴은 미술의 역사 중에서도 조각의 역사에서 처음 다뤄졌다. 진정한 얼굴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진은 초상 얼굴에 이별을 전제로, 죽음을 전제로, 소멸을 전제로 추억보다 진실한 당신의 기억을 간직하게 하는 생생한 초상으로 소중한 사람을 언제나 우리의 기억 속에 떠올려 준다. 영원한 젊을을 전제로 영원히 젊게 보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며 차이를 드러내는 정체성을 전제로 남을 위한 초상이 아니라 나를 위한 가식 없는 초상이다. 차이를 드러내는 정체성을 전제로 신분증 역할을 하며 처음부터 얼굴을 위한 것이었다.
인물의 아우라를 누구보다도 잘 재현한 나다르, 고고한 예술적 초상을 개현한 르 그레, 투명한 차가움으로 인물을 재현한 카르자, 품위 있는 초상을 재현한 아담 살로몽, 개성적인 초상사진을 만들어낸 영국의 카메론 여사 등 불후의 초상사진가들을 있다. 얼굴의 복제에 일어난 혁명, 그것은 사진의 혁명이며 인간의 정신 세계를 뒤흔든 사진술의 출현은 사람을 사람답게, 얼굴을 얼굴로서 존재토록 한 혁명이다.
역사는 1850년부터 1880년까지를 '영국의 예술사진시대'라고 말한다. 사진이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간 이후 영국은 전세계적인 사진전을 개최해주고, 국가가 사진을 매입해주며, 누구든지 계급과 재산에 관계없이 사진을 꽃피우겠다면 자유로운 창작할동을 보장하고 지원했다. 프랑스에서 받았던 화가들의 지독한 냉대와 문화비평가들의 빈정거림을 생각하면 영국은 상상할 수 없는 천국이기에 사진이 산업이 아닌 예술의 모습으로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번창했던 이 시기를 '영국사진의 황금기'라고 말한다. 또한 1851 프레데릭 스콧 아쳐의 콜로디온 습판사진술이 영국에서 발명합으로써, 영국이 확고부동하게 세계사진을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 다게레오 타입의 장점과 탈보타입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극복한 콜로디온 습판사진술은 새로운 확력을 얻었지만 다게레오타입이나 탈보트타입은 이후 사양길로 접어들어야 했다.
아라고가 사진의 출생신고서에 아예 확실하게 사진은 예술이 아닌 산업이며 결코 예술이 될 수 없는 시대의 자식이라고 못박았다면 좋았으련만, '민주적인 예술매체'라고 한 줄 더 적어 놓는 바람에 처음부터 일이 꼬이고, 예술에 대한 시비가 있었다. 물론 출생신고서 내용 한 줄 때문은 아니였으며 회화적, 산업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법정까지 가는 비극적인 운명의 사진을 말한다. 1851년 영국왕실의 비호아래 '런던만국박람회'에서 대히트를 치면서 프랑스의 사진계는 1855년 '파리만국박람회'를 개최하였으며 영국처럼 예술로 인정받아 국가와 사회로부터 공신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여겼고, 조직강화를 위해 1855년 창립한 '프랑스사진협회'는 이를 기반으로 '예술로서 사진'을 프랑스에 심어 예술의 성지, 살롱에 입성하는 본질적인 목적을 가지고있었다. '파리만국박람회'는 성공리에 막을 내렸으며 대중들로부터 대호평을 받아 예술로서 사진을 인정받았으며 마침내 1859년 '살롱 보자르'에 입성하였으나 앵그르로 대표되는 미술 측에서 사진의 살롱진출을 거부할 명분을 찾고 소송을 제기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진가 끼리 저작권 싸움이 붙어 창작품 문제로 1862년 사진은 자의반 타이반 두 가지 사안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사진의 악재는 '사진은 분명한 예술적 표현수단이며, 사진의 저작권도 창작품으로서 인정된다.'는 확정 판결이 내려지면서 사진은 법으로 인정받은 예술이 되었다.
185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약 30년 동안의 사진사는 영국의 '예술사진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프랑스 사진도 이시기 예술사진을 표방하였으나 세계사진사에 당당히 올려 놓을 만큼 당대의 위대한 역작들을 탄생시키지 못했다.
영국의 대표적인 사진가 중에는 힐, 아담슨는 칼로타입과 다게레오타입을 능숙하게 구사한 대표적 초상사진가이며, 오스카 레일란더는 예술사진의 최고 품격을 보여주었고, '예술사진의 아버지'로 통칭되었으며 '조합인화'을 고안하였다. 헨리 피치 로빈슨은 레일란더의 '인생의 두 갈래 길'을 보고 사진으로 빠져든 화가였으며 레일란더의 회화주의 사진을 계승하였으나 내용을 조금 달리하여 문학적 주제, 고딕로망중에서 아주 비극적인 결말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았다. 시대적 흐름으로 인한 피터 헨리 에머슨이 등장하면서 회화주의 예술사진은 새로운 예술사진 앞에서 죽음을 맞는다.
*오스카 레일란더의 '인생의 두 갈래길' 1857년 조합인화하여 만든 작품
헨리 피치 로빈슨 '임종' 1858년 조합인화를 이용해 내용만 다를뿐 형식과 방법이 오스카 레일란더와 같은 작품
1882년 한 젊은 아마추어 사진가가 영국 예술사진계에 나타나 '자연주의 사진'이라는 새로운 사진적 방법론, 새로운 예술과 미학을 주장한 피터 헨리 에머슨이다. 처음 사진을 접한 그의 나이는 26살의 아마추어 였지만 의사직업을 포기하고, 본격적인 사진의 길로 들어선다. 모든것을 자연적으로 이끌어 시대에 맞게, 변화한 삶과 환경에 맞게, 사진도 과학적 합리성에 자연스럽게 부합해야 한다고 새로운 예술사진의 방법론을 내놓는다. 그가 강조한 순수예술의 4가지 자연주의적 특성은 '자연적 주제', '자연적 환경', '자연적 기교', '자연스런 드러남' 이다. 그러나 사진가가 아무리 자연스런 주제, 소재, 대상을 자연스럽게 촬영을 했다하더라도 노출과 현상을 잘못하면 한순간에 사진을 망칠수 있는 기계중심, 기술 종속적인 사진의 한계에 인간의 창조성이 굴복한다는 사실 떄문에 전매특허인 '자연주의(적) 사진'을 포기한다는 놀라운 선언을 했으며 1889년 '자연주의 사진'이 출간된 지 불과 1년 만인 1890년 '자연주의 사진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팜플렛을 출간한다. '사진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며, 만약 사진이 예술이라고 한다면 가장 저급한, 하위에 놓일 예술일 것이다'라고 충격선언을 한 것은 이와 같은 과학 때문이었다.
살롱사진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전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하나의 사진 경향이자 사진적 방법론이었다. 1890년대에 독자적으로 사진만의 경향성과 화려한 사진제도로서 역사를 이구었다. 살롱의 역사를 볼 때, 18세기 초반 유럽에서 정부와 귀족 간 국가중대사를 나누고 친목과 교류를 증진시키는 고정적인 사교모임의 장소를 지칭했으며 이후 살롱 안으로 예술을 끌어들이면서 국가가 지원하는 연례 콘테스트도 살롱이라 부르게 된다. 살롱 사진의 특징은 크게 3가지로 연례 최고를 뽑은 사진 콘테스트의 장, 예술을 최고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그 시대 회화사조 혹은 회화풍을 따랐다는 점, 과반수 이상의 심사위원이 미술계(화가, 비평가) 인사들이어서 더욱 예술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역사적으로 상당한 부작용을 낳았다. 심사위원들이 선호하는 사진들을 출품함으로써 그에 부합한 사진품이 최고로 인식('런던살롱', '비엔나살롱', '필라델피아살롱'풍등 1870년~1890년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행), 콘테스트가 난립하여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상금제를 도입함으로써 황금만능주의를 심화, 살롱 본연의 취지였던 예술사진을 공모 전시함으로써 예술사진의 부흥과 함께 작품구입과 작품주문으로 연결된 활로를 자연스럽게 이끌어주는 기능이 사라져 아마추어 사진클럽과 서클들의 난립으로 살롱 콘테스트가 유희의 장으로 변질되었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독자적으로 사진의 길로 갔던 이유도 이와 같으며 1902년 모든 것에서 분리한다는 '사진불리파'의 창립을 선언했다. 양차 세계대전으로 쇠퇴된 살롱사진은 사진의 기능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현실의 눈을 통해서 보여준 시범의 장이었고, 1950년대를 기점으로 살롱사진은 점차 내리막길을 걷고, 아마추어 사진의 모습으로 움츠러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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