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현대사진의 쟁점 4
한국사진, 새로운 밀레니엄의 지형과 모색
-70년대 한국적 민주주의와 개발의 시대를 맞아 중공업이 발달하고 수출이 증가함으로써 비로소 경제상황이 호전되어 카메라 보급이 일반화되고 사진용품들이 흔해지면서 새롭게 막이 올랐다. 그러나 전국의 사진교육 기관은 서라벌 초급대학 사진과가 유일했다. 60년대에 초급대학 사진과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가르치는 선생들이 사진을 전공했던 사람도 아니고, 일정 수준의 예술적, 미학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아니었다. 일본의 사진서적과 경험을 통해 터득한 메커니즘적 노하우를 학생들에게 전수하는 것이 주요 기술로서 관건이었다. 그 당시 어디에도 사진전공자가 한국사진에서, 특히 예술사진에서 초식이 되어 진보적인 사진문화를 일궜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한국사진은 1세대 유학파들이 귀국했던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개화된다. 그리고 불과 십년 사이에 한국사진은 너무도 많은 변화와 변모를 일신한다. 한국사진은 '근대'를 경험하지 못한 채 곧바로 '현대'로 진입하는데, 그 단초적 사건이 1988년 5월 워커힐미술관에서 있었던 <사진, 새시좌 展>이다. 구본창, 김대수, 이주용, 임영균, 최광호 등 해외에서 사진을 공부한 8명의 유학파 1세대들이 꾸민 전시는 한국사진을 요동치게 했고, 결국 사진의 모습을 뒤바꾼 일대 사건이자 사진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한 역사적 분수령이었다. 유학파들이 점점 더 유입되어 사진교육의 질이 높아지고, 한국사진이 이전과 다르게 전개되고, 또한 사진계의 주류가 이제 아마추어 사진가들에서 사진을 전공한 프로사진가들로 바뀌는 총체적 전환의 시기였기 떄문에 가능한 것이다.
2000년 한국사진, 국제화의 원년
-지난 십년 동안 사진교육에 변화가 있었고, 표현형식도 다양해졌으며, 작가들이 이론적으로도 많이 성숙했지만 사진계를 넘어선 영역의 확대와 국제화를 위한 문화 인프라로서의 모습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1998년 '사진영상의 해'가 개최되었다. 분위기에 편승하여 사진계 내에서 문화인프라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싹텄고, 계간 [사진비평]이 창간되어 평론분야의 활성화에 기여했으며, 또한 사진이 미술 속으로 편입해 들어감으로써 점차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8년 한국사진이 처음으로 해외로 나갔으며, 아주 자연스럽게 국제적인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매년 우리 사진계의 개인과 단체가 해외에서 전시하거나, 해외 사진이 이 땅으로 건너와 전시를 꾸미고 학술회의를 개최한 숫자가 상당하다.
젊은 작가들의 눈부신 성장
-최근 한국사진의 주목할만한 변화 중에는 젊은 작가들의 급성장과 그 들이 역동적이고 실험적인 사진의 모습이 있다. 30대 이하의 젊은 작가들이 중견 및 원로작가들을 제치고 광주비엔날레와 같은 국제미술축제에 초대를 받거나, 유명 미술관의 의미 있는 기획전에 참가하여 각광을 받는 등 가장 활동적이고 창조적 이슈를 제공한 작가는 대게 30대 이하의 젊은 작가들이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유명 중견 및 원로작가들에 가려 빛을 내지 못했던 이들이 자체적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역동적인 사진을 선보임으로써 놀라운 성장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최근 한국사진이 젊어지고 역동적이 됐다는 말을 듣고, 또 인접 미술계로부터 사진들이 신선하고 볼거리가 많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전적으로 젊은 작가들의 눈부신 활동 때문이다. 성의 문제, 상품의 문제, 욕망의 문제, 도시의 문제 등 현대적인 일상과 소비, 성과 여흥, 놀이문화, 진실과 허구, 가상과 실재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다가서고 있다. 사진계 안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대미술의 일부로서 확장된 영역 속에 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국제화의 필요성
-근대 이후 세계 여러 나라들이 자국의 예술을 세계를 향해 열고 또 광범위하게 드러내려 했던 것은 단순히 한 나라의 예술적 수준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그 정세성과 함께 민족적 창의성과 예술적 고고함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 위함이다. 오늘날 한국사진의 현황을 보면 다른 예술적 장르에 비해서 국제화의 정도가 너무도 뒤쳐져 있고, 일 백년이 넘은 긴 사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사진에 대한 낮은 인식 그리고 거기에다가 사진계 내부의 얕은 작가층과 국제화에 대한 인식부족이 겹쳐져 있다. 이처럼 한국사진의 뿌리 깊은 아마추어에 대한 인식부족이 겹쳐져 있다. 이처럼 한국사진의 뿌리 깊은 아마추어리즘과 구태의연한 제작행위 그리고 문화인프라로서 세계성 부재가 빛어낸 이러한 총체적 난맥상이 현재 보여지고 있는 한국사진의 현주소이다. 개인은 개인대로, 단체는 단체대로, 제도는 제도대로 이제부터 국제화에 대한 새로운 눈뜨기가 필요하고 착실한 준비가 선행되어야 한다.
국제화의 조건들
-한국사진의 국제화라고 했을 때 그 전체 조건들은 많다. 그 중에서 크게 서너 가지 중요한 조건들을 든다면 국제화에 대한 작가들의 발상의 대전환, 국제화를 위한 실천양식(사진적 프로세스)의 완결성, 국제교류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업성과 마케팅에 대한 치밀한 비즈니스 전략, 그리고 지속적인 연계성을 위한 부단한 물적 교류 및 대인관계의 형성이다. 작가들의 발상의 대전환이 요구된다는 것은 국제화에 대한 작가들의 인식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국제화를 위한 제작양식의 완결성이 요구된다는 것은 작품제작에 있어서의 필수적익 프로세스를 말한다. 국제교류에서의 치밀한 비즈니스 전략은 상업성과 마케팅의 성공여부를 가능케 한다. 지속적인 물적 대인관계의 형성은 국제화란 사실 부단한 접촉과 교류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지속적인 관계맺음에서 활성화 된다.
국제화의 전략과 방향
-작가들의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최소한의 시스템이 구축된다면 전략과 방향에 따라 당장이라도 국제화의 여건을 만들 수 있다. 물론 이것들은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다수의 힘과 제도를 통해서 가능하며 또한 여기에는 작가들이 저마다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을 갖추어 줄 때 현실화될 수 있는 일이다. 국제화를 위한 전략과 방향은 각기 다른 모습을 띠는 가변성을 가지고 있다. 국제화 마인드가 일차적으로 작가들에게 통용되는 사안이라면 시질적인 방향은 한국사진 전체에 통용되는 사안이다. 국제화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포트포리오가 만들어지고 준비된 작가의 창조공간, 즉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작가의 예술공간인 작업실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작각의 작품집, 평론가들의 비평문, 그리고 관련 저널로부터 스크랩한 기사가 영문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한글로만 된 작품집, 비평문, 저널들은 전혀 국제적으로 소통성을 갖지 못한다. 영어로 되어 있어야 작가의 위상과 스케일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준비된 작가로서 신뢰감을 준다. 국제화를 위한 방향성에 있어서는 작가들의 개인적인 전략과는 다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한다. 먼저 제도적 방향의 문제는 한국사진을 어떻게 알리고, 무엇을 비교우위에 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일차적이고, 기타 세부적인 문제로서 그것들을 위해 지금 당장 어떤 시스템을, 혹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인가 이다. 현재 시점에서는 우리 사진의 특정한 내용과 형식을 선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진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알리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에게 국제화를 위한 새로운 사진 이벤트의 필요성이 즉각 요청된다. 한국사진도 이제는 충분히 성숙했고 또 사진에 대한 인식이 그 어느 때보다 높기 떄문에 과거와 다른 각도에서 한국사진을 국제화하는 새로운 이벤트의 장이 필요하고 그리고 그것들이 국제적인 교류의 장이 되고 장차 사진 마케팅까지 연결되는 의미 있고 내실 있는 국제화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 또다른 맥락에서 한국사진의 국제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도적인프라를 위한 필수적인 인적 자원이 필요하다. 국제화를 위해서는 분야별 전문가들이 필요한데, 예컨대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고 했을 때 외국어 능력을 가진 이론가들과 실제 학술회의를 이끌 실무자들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학문적, 학제적 토론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에 대한 토론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한국사진의 국제화 전체조건이 작가들의 기본양식에 속한다면 그 전략과 방향은 기관과 제도가 이끌어가야 할 기본적 사안에 속한다. 작가, 제도 모두 철저한 사전준비가 된 상태에서 국제미술제가 그렇듯이 국가적으로 자국의 사진을 알리고 작가를 키우는 전략이 필요하고, 그 전략을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한국의 문화예술적 역량을 만방에 드높일 뿐만아니라 문화자원으로서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사진의 수용과 확산 방식
-20세기 후반부까지도 사진에 대해 가졌던 우리의 인식은 초상사진과 기념사진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다. 사진이 저널적인(기록적인) 측면과 표현적인(예술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할 때, 20세기 전반부는 그야말로 사진관 중심의 초상사진이 전부였고, 20세기 후반부는 기념사진과 취미사진이 거의 전부였다. 사진이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서 혹은 예술과 문화의 일부로서 모습을 드러냈던 때는 1920년대 이후부터 1945년 사이, 일제 강점기 시절이었으며 한국사진이 사진의 순수한 기록적인 측면을 깨닫고 사회적 발언으로서 저널리즘적 시각을 표출했던 때는 6.25 동란이다. 어쨌든 다소 맥락은 다르지만 전쟁을 통해서 우리도 사회현실을 향해 사진의 시각적 확장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임응식에 의해 '생활주의 사진'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서 자각한 사진의 사회적 기록성은 스트레이트 사진이라고 하는 사진의 형식적 범주에 지나치게 안주함으로써 곧 표현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눈앞의 현실을 순수하게 기록한다'는 순수 사진 미학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80년대 다원주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다양한 표현성을 발현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형식성 극복을 위한 다양한 시도
-1988년 5월 워커힐 미술관에서 열린 <사진, 새시좌전>은 바로 그런점에서 한국사진의 새로운 벼화의 분수령이 되었던 전시였다. 원래 "획일화된 한국사진에 사진의 다양한 표현성을 보여주자"는 것이 전시취지였으나, 전시는 그것을 넘어 한국사진에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왔다. 그때의 전시는 지금의 한국사진을 있게 한 진보의 신호탄이자 성숙의 단초였다. <사진, 새시좌전>이 한국사진에 형식적 개념적 일대 변화를 가져온 촉매적 전시였다면 1991년 11월 장흥 토탈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사진의 수평전>(약칭 수평전)은 <새시좌전>이 점화시킨 다양한 표현성에 문화적 소통성까지 가미시킨 실험적인 자리였다. <수평전>은 이후 2회를 더 거치면서 전후 세대로의 주도권 교체, 표현의 자율성 획득, 그리고 사진의 다양한 사회 문화적 소통성을 구축하게 되었는데 <수평전>에서 보여준 그러한 역동성이 90년대 한국사진의 발전과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문화예술계에 과거와 다른 사진의 모습을 인식시켰다.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표현매체로서 사진의 위력을 깨닫게 했다. 한국사진의 과거 궤적은 어떤 면에서 본다면 사진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천착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초상사진이었든, 예술을 위한 예술사진이었든, 기계적 기록성에 대한 스트레이트 사진이었든, 혹은 표현의 확대를 위한 '메이킹 포토'였든 간에 지난 궤적은 한마디로 사진의 형식성에 대한 추구였다. 그렇다고 보면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21세기 한국사진의 새 패러다임의 전체 조건이 될 것이고, 그런 다음에 사진의 내적 구조를 튼튼히 하는 일, 테크놀로지 시대에 사진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매체적 기능을 부단히 탐색하는 일, 그리고 국제화를 위한 또다른 소통체계인 사진시장을 여는 일이 앞으로 주요 패러다임이 될 것이다. 여기서 내적 구조를 튼튼히 한다는 것은 사진의 본질에 대한 깊은 자각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고, 사진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매체적 기능을 부단히 탐색한다는 것은 디지털 사진의 급성장에 대한 대처로서, 기존 사진재료의 생산 중단이 궁극적으로 사진의 존재론적 위험으로 다가오는데 따른 준비가 필요하다는 의미다.